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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 172

경주 남산 천룡사 창건 연기설화의 전체 정보

관련문화자원내용
에는 고려시대 천룡사의 창건에 관한 기사가 전하고 있다. 천룡사는 최제안이 창건했는데 천룡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기록하기길, 최제안의 두 딸 이름이 큰딸이 천녀(天女)이고 동생이 용녀(龍女)였는데, 이 두 딸을 위하여 지은 절이었기에 이름을 천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천룡사를 창건한 최제안의 증조부인 최은성(崔殷誠, 혹은 崔殷緘)에 대하여 전하기를, 최은성은 신라 55대 경애왕 때의 사람인데, 그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음을 슬퍼하여 중생사의 관음보살 앞에 지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지극한 정성에 감응이 있어 최은성의 부인은 옥동자를 낳았다. 최은성 부부는 감격하여 부처님께 감사하며 소중하게 아기를 키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기가 태어난지 석달만에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와 큰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신라왕은 견훤에게 목숨을 빼앗겼고 후백제의 군사들은 서울에 들어와서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다. 최은성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을 들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때 최은성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안고 중생사의 관음보살상 앞에 엎드려 빌었다. “이웃 나라의 군사가 별안간 침입하여 일이 이미 급했는데 어린 자식이 누가 되어 함께 지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참으로 대성이 점지해주신 자식이라면, 원컨대 대자의 힘을 빌어 덮어 주시고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로 하여금 다시 서로 만날 수 있게 해 주옵소서”하고 슬피 눈물을 흘리며 세 번 울고, 세 번 고하고는 포대기에 싼 아기를 관세음보살 발 아래 내려놓고 칼을 들고 싸움터로 나갔다. 그 후 보름이 지나서 적병들이 물러가니 싸움은 끝났다. 최은성은 곧바로 중생사로 달려왔다. 정신없이 아기 이름을 부르면서 관음전의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향탁(香卓) 아래서 아기가 처음과 같이 잠자고 있었다. 살결은 금방 목욕한 듯 정결하고 입에서는 젖냄새가 물씬 나고 있었다. 최은성은 너무나 감격하여 관세음보살 앞에 무수히 절을 하고 아기를 안고 돌아와서 길렀다고 한다.
관리주체
기타
국립공원
경주
문화자원명
경주 남산 천룡사 창건 연기설화
보존상태
보존상태 양호
상세수량
1
자원관리자
일연
자원세부내용
경주 남산의 천룡사는 1040년(고려 정종 6)에 당시 내사시랑(內史侍郞同內史 門下平章事 柱國) 최제안(崔齊安)이 신라 때부터 있었던 고위사(일명 수리사)를 수리하여 그의 조상이 전생부터 부처님과의 깊은 인연으로 태어났음을 알리고, 또한 왕실의 성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라고 한다. 천룡사는 남산의 많은 절터 중에서 이름이 확실하게 남아있는 세 절 중의 하나이다. 사천왕사 창건설화에서 신라 통일 초기 당나라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천룡사에 와서 "이 절이 허물어지면 나라도 망할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이때가 7세기 말경이므로, 처음 천룡사의 창건은 사천왕사나 망덕사와 같은 시대로 추정할 수 있다. 천룡사는 18세기 말까지 존재하였다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원소유자
없음
자원수량
1
자원입지
기타
지번주소
참고문헌
권4, 탑상4, 삼세관음 중생사 조 이범교역해, 2002, , 민족사 윤경렬, 1993, , 불지사 보우문화재단, 1992, , 글밭
최초모니터링년도
2012
탐방프로그램활용여부

상세 시스템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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