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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심사 창건설화의 전체 정보

관련문화자원내용
옛날에 이 절이 세워지게 된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득한 옛날 신라시대였다. 무주땅에 한만동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야기는 한씨의 할아버지가 태수 벼슬을 할 때부터 시작된다. 한만동은 할아버지인 한태수가 자부(子婦: 며느리)를 보려고 날짜까지 받아놓은 어느 날이었다. 그 집에는 득이라는 기운꼴이나 쓰고 술 잘 먹고 싸움을 잘해서 매번 말썽을 일으키고 다니는 종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이 한만동의 할아버지가 그자를 시켜서 심부름을 보냈는데 몇시간이면 넉넉히 다녀올 곳을 온존일 있다가 돌아왔다. 더구나 술이 엉망으로 취해서 비틀걸음으로 상전집에 돌아온 것이다. 이것을 본 한만동의 할아버지는 화가 안날 수가 없었다. “이놈아, 어디 가서 술을 처먹다가 이제야 오는 거냐!” 대번에 마루청이 울리도록 호령을 내렸다. 득이는 이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역시 비틀거리면서 허리춤에서 편지를 꺼내 들고 있을 뿐 아무 말이 없다. “네 이놈, 냉큼 그 편지를 이리 못 가져 올까?” 두 번째 호령이 내리자 득이는 정신을 차려서 편지를 들고 앞으로 주춤주춤 나오다가 픽 꼬꾸라지면서 “제미붙을, 이 노릇도 못해먹겠다.” 하더니 다시 아무 소리가 없다. “저런 죽일놈 보아, 나를 보고 욕을 하고....... .” 한만동의 할아버지는 마루청이 떠나가도록 발을 구르는 것이었으나 득이는 엎드러진채 코를 골고 있었다. “온 이런 변괴가 있나 아무리 술취한 미친놈이라고 하지만 상전을 몰라보고....... .” 한만동의 할아버지는 편지를 받아 들며 이렇게 뒷말을 남기고는 사랑방으로 사라졌다. 그는 득이가 술만 깨면 치죄를 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 후 득이의 동료들과 득이의 처가 낑낑대며 득이를 방으로 옮겨다 뉘었다. 한잠을 자고 난 득이는 목이 껄껄했다. “물!, 물!” 하면서 물그릇을 찾으니 득이의 처가 벌떡 일어나면서 “물은 무슨 물이요~, 뻔뻔도 하지. 영감마님께 그렇게도 발악을 하고 어떻게 부지를 해요!” 하며 얼굴이 새파래져서 남편을 노려봤다. “별수 있나, 물이나 줘. 자리께에 떠다 놓은것도 없단 말인가!” 득이는 도리어 화를 냈다. “그래두 물은 찾는구려. 내 온 참 떠다 주리다.” 득이의 처가 낯을 찌푸리면서도 나가서 물 한 그릇을 떠 왔다. 득이는 벌컥벌컥 물을 마시더니 다시 그대로 쓰러져서 태평하게 잠들어 버리는 깃이다. “사람이 어쩌면 저럴까?” 득이의 처는 이렇게 어이없이 하면서도 그대로 남편의 옆에 누웠다. 득의 처는 자기가 당해낼 심산이 있어서 저러는 것이려니 하고 걱정하다가 이어 쿨쿨 자 버렸다. 아침 해가 동창에 비칠 때서야 득이의 처는 눈을 떴다. 그녀는 너무 늦도록 잤구나 하고 놀라며 일어났다. 그러나 더욱 놀랄 일이 있었다. 밤중에 물을 달라고 할 때까지 정신이 없어 보였으며 물을 받아 마시고도 이어 잠들어 버렸던 남편득이가 간데 온데 없어진 것이다. “이를 어째! 이이가 어디 갔을까?” 득이의 처는 당활해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 방 저 방에서 하인들이 일어나 나올 뿐 득이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득이가 달아났다!” 이 소리는 대번에 하인들에게 퍼졌다. 한만동의 할아버지는 그것을 알자 곧 득이의 처를 불러들여 어찌 된 까닭을 물었다. 득이의 처는 이실직고로 “어젯밤 자다가 일어나 물을 달라기에 냉수 한 그릇을 떠다 주었더니 그것을 받아 마시고는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 보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네 이년! 년놈이 짜구서 네 서방을 도망가게 하고서 요망스럽게 꾸며 대는게 아니냐?” “아니 올시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이년을 잡아다 가두어라, 오늘 치죄할 것이로되 경사스러운일이 앞으로 얼마 안 남았으니 그때나 지나거든 치치하겠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득의 처는 사사로이 가두는 관속에 갇혔다. 그것은 뒤채로 있는 빈 광이었다. “에이 불쌍해라! 득이란 놈이 죽일 놈이야!” 비복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또 어떤 하인은 “새아씨 혼인잔치도 구경 목하고 그만 죽일 터이지~!” 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느덧 시일이 흘러가 혼인날이 지나고 이어 우례날 우례날 : 신부가 처음 시댁으로 들어오는 날 이 왔다. 때는 팔월 망간(望間: 음력 보름)이라 달이 너무 밝았다. 득이의 처는 갇혀있는 문틈으로 넣어주는 밥을 얻어먹으며 십여 일을 지냈다. 하루는 혼인날이라고 떠들고, 하루는 우례날이라고 떠들더니 드디어 조용해졌다. 다만 그윽하고 밝은 달만이 창틈으로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생각하면 분하고 섧고 억울해서, 며칠 동안은 눔물로 지냈다. 그러나 차차 마음이 가라앉게 되자 딴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뱃속에 있는 일곱달 된 득이의 자식 생각이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이 뱃속에 있는 자식도 그대로 죽겠구나, 네가 살아나야겠는데 무슨 방업이 없을까....... . 달아날 수는 없는 것일까....... .“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때 새로 시집온 바로 한만동의 어머니가 밤중에 뒤를 보고 방으로 들어오려 한 즉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가민히 서서 귀를 기울이니 그것은 사람이 흐느껴 우는 소리였다. 신부는 놀랐던 가슴을 가라앉히고 가만가만 그 흐느껴 우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은 고리가 걸려 있는 큰 광이었다. 신부는 숨소리를 죽이고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다가 “거기 누구 있어요?” 하고 물엇다. 그랬더니 울음소리가 뚝 그치고 대답이 없다. 신부는 이상스럽게 생각하면서 그 울음소리가 나던 광속을 달빛을 따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광속에는 초췌한 한 여인이 꾸부리고 앉아서 울고 있던 것이다. 신부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구구시죠? 처음 뵈옵는 분이신데....... .” 간신히 모깃소리만큼 말을 하는 것이다. 신부는 그 소리를 듣고 더욱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 불쌍해라! 어쩌다가 이런 꼴을 당하고 있을까, 난 시집온 색신데....... .” 이 말을 들은 득이의 처는 한편 놀라며 반가웠다. “어떻게 여길 오셨어여?” 그녀는 자기 남편이 이 댁 노영감님에게 죄지은 일과 그 대신 자기가 이 광속에 갇히게 된것과, 또 혼인날이 지나면 자기를 죽인다는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는 또다시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신부는 이야기를 듣고보니 몹시 불상한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사내의 죄로 여자가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애처로운 일로 생각되었다. 신부는 자기도 모르게 얼른 고리를 벗겨주었다. “어서 나와요” 하면서 광문을 살며시 열어 놓고는 뒤도 안 돌아다보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날 노영감이 대청에 좌정하고 득이 처를 잡아들이라고 종들에게 명령했다. 종들이 득이 처를 가두어 둔 광에 가보니 텅 비어 잇었다. 혼비백산한 종들은 달려와서 그 사연을 보고 했다. 노영감의 얼굴은 금시 붉그락 푸르락 하더니 “이놈들 너희들이 어디다가 빼돌리고 내게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마룻청이 떠나갈듯한 호령이었다. 종들은 여출일구(如出一口) 여출일구 :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이 여러 사람의 말이 한결 같음. 로 “저희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 옵니다.” 하는 소리를 연발하면서 황공무지해 하고 있었다. 이때에 신부가 겁내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침착한 태도로 “아버님” 하고 똑똑하고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영감은 종들은 꾸짖다가 이 불의에 나타난 새 며느리의 모습에 적이 놀라며 바라다보았다. “여종은 제가 놓아주었사옵니다.” 하고 신부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다. 노영감은 더한층 놀라며 물었다. “뭐? 네가 놓아주었다고?” “네” 노영감은 낭패라는 듯이 입맛을 다실뿐 아무 말도 안했다. 뜰아래 긍긍하고 있던 여러 종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수군수군 하면서 모두 물러가고 노영감도 사랑으로 나가버렸다. 처음 노영감은 말마디나 할까 생각했으나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는 새 며느리를 꾸짖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 같고 또한 죄 없이 갇혀 있는 여인이 얼마나 불쌍해 보였기에 새 아기가 그러첨 놓아 주었으랴 싶어서 아무 말은 안 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웬 일인지 이 집의 재산은 차차줄고 그로 인하여 영감도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그때의 신부이던 며느리가ㅣ 늙었고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그 맏아들이 바로 한만동인 것이다. 다시 또 수 십 년이 흘렀다. 세월은 사람을 늘게 하는 것, 득이의 처를 놓아 주었던 그 신부가 늙어서 드디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상을 치르느라고 분주한 판에 한사람이 상청에 뛰어 들어 대성통곡을 하며 슬피우는 것이다. 처음에 워낙 초상집이라 분주해서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 집안은 당황하게 되었다. “이게 웬 중일까?” 상주로부터 조상 온 손님까지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중이 곡을 끝내는 것을 기다려서 상주는 “너는 어느 절 중인데 앙반 집안 초상에 와서 감히 곡을 하는가?” “저는 별 사람이 아니라 득이의 자식이올시다. 제 어미 생전에 늘 돌아가신 마님께 은혜를 입은 말씀을 듣고 항상 감격한 마음으로 지내 옵던바 이제 마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 일은 한만동도 자기 어머니에게서 귀가 닳도록 들은 일이다. “어 그런가, 그 일은 나도 잘 아는 일이지 그런데 어떻게 중이 되었는가?” 한만동은 그가 중이 된 것이 이상했으며 또한 초상 때 달려든 것이 필유곡절(必有曲折) 필유곡절: 반드시 어떠한 까닭이 있음. 이라 하고 생각하고 물어보았다. “아니올시다, 사실은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마님의 은혜를 갚아볼까하고 궁리하던 끝에 소인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십 년 동안을 오로지 풍수의 술만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마님을 좋은 자리에 모셔 드려서 댁이 부귀 다남하시고 오랫동안 복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소원으로 그랬습니다. 그것이 재생시켜 주신 은혜 갚은 길이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했더랍니다.” 이 말을 들으니 한만동도 여간 감격되지 않았다. 그실 어디다가 모셔야 할지 집안은 가난하고 선산은 벌써 한 자리도 쓸 수 없이 차 있어서 좋은 자리를 구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만동은 드디어 성복(成服)을 치르고 득이 아들을 따라 그가 보아 놓았다는 산소를 찾았다. 산지는 봉루가 지고 쑥이 우거진 무등산 골짜기를 득이 아들이 가리키며 “이곳이 가장 좋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에이 여보게, 이곳은 옛날 산소 자리가 아닌가?” “아니올시다, 이곳은 원래 명당자리로서 옛날부터 누가 표를 해 놓은 자리입니다.” 이제 그것을 헐어 보시면 산소 자리가 아닌 것을 대번에 아실 것입니다. “그래 봄새” 한만동은 대단히 기뻐하며 모친을 그곳에 모시었다. 장례가 끝난 다음 중은 작별을 고하며 “이곳으로 말하자면 삼년상만 지내시면 차차 가계가 느실 것이고, 또 십여 년 지내시면 서방님께서 벼슬을 하시어 복록(福祿)이 무한하실 겁니다.” 라고 말하고는 굳이 말리는 것을 사양하고 표연히 떠나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한만동의 집은 차차 빈궁에서 펴기 시작해서 가계도 넉넉해지고 십여 년 되는 해에는 한만동이 벼슬을 하여 승주 고을의 원님이 되어가게 되었다. 한만동은 그곳에 가서 정사를 하면서 이 일을 잊지않고 과연 그 곳이 얼마만한 명당인가를 궁금히 생각해 왔다. 그래서 하루는 가장 유면한 지관이란 자를 데리고 와서 그 장지를 보였다. “어디 쓰겠습니까” 장지를 본 지관은 대번에 이런 소리를 하며 좋지 않다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는 잘 되나 나중에는 좋지 않다는 말을 그럴 듯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소?” 한만동은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러나 그실은 예나 지금이나 지관이란 돈 먹자는 것으로 잘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한말인데, 한만동은 그만 넘어가고 만 것이다. “내 좋은 자리를 하나 잡아 드리리다.” 이것은 벌써 돈먹기 위해서 면례(緬禮)를 권한 것이다. 한만동은 그의 말대로 면례를 하기로 하고 그 지관이 잡아주는 장지로 파 옮기려 했다. 하루는 한만동이 하인을 데리고 묏자리를 파는데 산상으로부터 한 백발 노인이 급히 내려오면서 “여보 여보, 누가 묘를 파시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깜짝놀라 반이나 파던 것을 멈추고 노승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노승이 내려와 급기야 대면하니 이는 바로 득이의 아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이곳을 왜 파십니까?” 노승이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이렇게 묻는다. “이곳이 좋지 못하다하여 면례를 하려고 파는 중이오.” “아뿔싸! 일이 벌써 글렀습니다. 이곳을 파실 것 같으면 진작 소인과 한번 의논하실일이지 이렇게 파 놓으시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한만동은 노승의 말을 들으니 또한 그럴싸했다. “어디 만나 볼 수 있어야지, 그래서 자리는 좋지 못하다고 하고 며칠 생각하다가 기어이 파 옮기기로 한 것이요.” “이제라도 과히 늦니 않습니다. 그대로 메우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그냥 두셨더라면 여간 좋은 자리가 아닌 것을 그랬습니다. 이곳을 파신 결과로 십여년 후에는 나리마님께서는 눈이 머실것입니다. 그러나 자손들에게는 좋으니 그대로 메우시오, 나리좀 와 보십시오. 이렇게 이곳에서 따뜻한 기운이 돌지 않습니까?” 하며 노승은 관 밑에다 손을 넣으니 과연 관 밑이 따뜻했다. 그제야 한만동은 깜짝 놀라며 “여보게,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며 울쌍을 했다. 그러나 노승은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절터를 잡아 드릴 테니 그곳에 절을 세우시고 불공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나리마님께서 눈도 머시지 않고 명당자리를 파헤치신 액땜이 될 것이옵니다.” 고 말하는 것이다. 한만동은 “꼭 그 말을 따를 것이니 그러면 어서 절터를 잡아 주시오.” 그때 노승이 한만동에게 잡아준 절터가 바로 지금의 증심사 자리며 한만동은 액땜하기 위애서 곧 절을 세웠으니 그것이 증심사라는 것이다. 한만동은 절을 짓고 자기 어머니의 명당자리를 잡기 위해 일생을 바친 스님의 명복을 길이 빌었다는 것이다.
관리주체
기타
국립공원
무등산
문화자원명
증심사 창건설화
보존상태
보존처리 확인필요
상세수량
1
자원관리자
없음
자원세부내용
860년에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했다고 한다. 1094년 혜조국사가 중수한 후 1443년에 김방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불타, 1609년에 석경, 수장, 도광이 다시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임제종 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인 1951년 4월 22일 오후 9시에 오백전과 노전만을 남기고 모든 건물이 화재로 타 버렸다. 1970년 이후 다시 복구되었다.
자원소유자
기타
자원수량
1
자원입지
기타
지번주소
참고문헌
무등산국립공원 자연자원조사, 국립공원 연구원, 2014.
최초모니터링년도
2015
탐방프로그램활용여부
아니오

상세 시스템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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