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 주소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128-1
영문주소
97-68 Bangye-ro, Boan-myeon, Buan-gun, Jeonbuk-do

반계선생유적지의 전체 정보

관련문화자원내용
○문화재지정 : 전라북도기념물 제22호 1974년 9월 24일 유형원 부안에서 꿈을 준비하다. 반계 유형원(1622~1673)이 살았던 보안면 우동리 마을은 부안 김씨들의 집성촌이다. 유관이 국가에서 받은 땅을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이 김홍원에게 판 이후 이곳은 부안 김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1) 반계라는 호를 통해본 유형원 반계라는 호는 그가 살던 마을을 흐르는 시내에서 호를 따 왔다고 하나 부안김씨 고문서에는 분명히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 이름은 장천이라고 하였다. 반계는 오늘날 중국 섬서성 보계시 동남에 있는 강물로 남산이란 곳에서 물줄기가 시작되어 북쪽으로 흘러 위수라는 강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강태공이라 부른 태공망 여상이 주나라 문왕을 만나기 전에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다. 세상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강가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태공망은 늦게나마 문왕을 만나 주나라를 세우는천하대업에 일조 할 수 있었다. 유학을 배우던 조선시대 선비라면 이런 고사를 익히 알고 있어서인지 유형원 이외에도 여러 사람이 반계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ㅂ ㅗㄴ다면 반계라는 호는 중국고사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유형원은 15세인 1636년에 병자호란을 피하여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에 갔다. 현재 원주시 문막읍에는 반계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에는 원주에 남산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바로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우고 때를 기다리던 반계가 시작된느 곳이 남산이다. 이러한 점들이 유형원이 병자호란을 피해 들어온 원주에서 반계라는 호를 짓게 되었을 개연성도 보여준다. 병자호란을 피해 원주로 피난 오면서 유형원은 여진족인 청에게 동방예의지국이 짓밟히는 형상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강태공이 문왕을 도와 나라를 세우듯 혁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2) 부안으로 내려오다 유형원의 증조부 유위는 현령을 할아버지 유성민은 정랑을 지냈으며 아버지 유흠은 28세 나이로 광해군의 복위를 꾸몄다는 무고에서 비롯된 유몽인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을 때 한림의 요직에 있었다. 어머니는 우참찬 이지완의 딸이고 그의 처는 철산부사 심항의 딸이었다. 이러한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유형원은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아 다섯살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일곱 살 때 서경을 읽었다. 이처럼 전형적인 사류로서 교양을 닦으며 유학의 연마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가족 제사 등 일체의 의례를 주문공가례에 의거하여 철저하게 지켰다. 32살인 1653년(효종 4)겨울에 할아버지의 3년 상을 치르고 글을 지어 읊조리면서 아내와 딸을 거느리고 부안 우반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에 대한 기록에는 '항상 큰 배 네다섯 척을 두니 지극히 편리하였고 좋은 말을 기르니 하루에 수 백리를 갈 수 있었다. 좋은 활과 아름다운 화살과 조총 수십 자루로 두 마을 사람들을 가르쳤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군사 훈련을 시키는데 사용한 큰 돌들이 들판에 남아 있다. 3)반계수록이 말하는 세상 관리 선발제도 개선 노비신분 세습제 철폐등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으나 당대에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런 그의 개혁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조선 후기 사상의 중요한 흐름이 되었다. '반계수록'에는 그의 개혁방안이 풍부한 고증과 함께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개혁의 출발점은 역시 토지제도로서 그 핵심은 경제의 원천인 토지가 직접 농사짓는 농민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공전제의 실시였다. 이는 많은 농지를 소유한 채 놀고먹는 지주가 없도록 하며 부지런히 농사짓는 농민이 굶주리는 일이 없는 획기적 방안이었다. 미수 허목이 유형원을 "왕을 곁에서 보좌할 만한 재목"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천재를 품고서도 뜻을 버리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당시 사회구조의 불합리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도 천하를 경영할 만한 능력을 가진 인재이지만 당시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산 나무가 있는 주변 논 사이에 반계의 집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고 냇물 건너 맞은 편 산기슭에 그가 공부하며 '반계수록'을 썼다는 집이 있다. 이 집은 1981년 복원하여 보전되어 있다. 유형원은 죽은 지 1백년이 되어서야 인물됨이 알려졌으며 '반계수록'도 그제야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었다. 이 책에 관심을 갖고 그 초고를 읽어본 영조는 탁월한 내용에 감탄 이를 인쇄하여 널리 세상에 알릴것을 명하였다. 백성의 고통에 가슴 아파했던 그의 뜨거운 열정 오직 조선의 개혁을 위해 책을 쓰며 일생을 바쳤던 그의 개혁 정신과 주장은 역사의 재해석을 기다리고 있다.(부안문화유산자료집 p.405~407)
관리주체
기타
국립공원
변산반도
문화자원명
반계선생유적지
보존상태
보존상태 양호
상세수량
1
자원관리자
부안군
자원세부내용
반계선생유적지(磻溪先生遺蹟地)는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있다. 유형원(1622∼1673)은 조선시대 효종 현종 때의 실학자로서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정랑 유성민(柳成民)의 손자이며 검열(檢閱) 유흠심(柳欽心)의 아들이다. 유형원은 1622년(광해군 14)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인자하고 지혜가 총명하였다고 한 다. 15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가족과 함께 피난길을 떠났다가 암담한 나라의 현실과 농민들의 비참 한 생활을 몸소 보고 겪었다. 부안으로 낙향한 조부를 따라 1653년(효종 4)에 이곳으로 왔다. 평생 책 에 묻혀 야인으로 지내며 학문에 전념하였고 1670년에 '반계수록'을 완성하였다. 이곳의 지명을 따서 호를 반계라고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우동리는 유형원이 살던 곳이라 하여 반계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우반동이라고 불렀다 가 일제강점기에 우동리로 되었다고 한다. 당산나무가 있는 곳 주변에 집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 적이 없고 와편과 초석만 남아 있다. 맞은편 산기슭에 유형원이 공부를 하며 '반계수록'을 썼다는 집 이 있다. 현재의 집은 다시 지은 것이다. 마당과 대문 입구에 우물이 나 있다. 1974년 주민과 정부의 지원으로 유형원선생 유적비가 이곳에 건립되었다.
자원소유자
부안군
자원수량
1
자원입지
기타
지번주소
참고문헌
○ 참고문헌 - 국립공원관리공단, 2009, 국립공원 역사문화자원 자료집, 국립공원관리공단 - 국립공원연구원, 2009, 변산반도국립공원 자연자원조사, 국립공원관리공단 - 부안군, 2004, 부안군문화유산 자료집, 부안군 - 부안군, 2001, 변산반도국립공원 부안 ○ 참고사이트 - 부안문화원(http://buan.kccf.or.kr/) - 부안군청(http://www.buan.go.kr/)
최초모니터링년도
2010
탐방프로그램활용여부

상세 시스템 데이터

주변 국립공원공단_경관자원 (12) 이동하기

주변 한국관광공사_열린관광지목록 (12) 이동하기

주변 한국관광공사_비대면 안심관광지 목록 (12) 이동하기

주변 한국관광공사 전국 야영장 등록 현황 (12) 이동하기

주변 통일부_DMZ인근 지역 관광 정보 데이터 (12) 이동하기

주변 관광지(출처: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