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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410-18

남해 척화비의 전체 정보

관련문화자원내용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 각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낮은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지붕돌을 올려놓아 다른 척화비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는 당시 대원군의 명으로 척화비를 곳곳에 세우자 이 지역의 관청에서 그것을 본 떠 세우면서 양식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척화비를 일제히 세우던 고종 8년(1871)에 함께 세운 것으로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비들이 철거되었으나 이 비처럼 몇기의 비들이 여전히 남아 그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문화재청). 척화비는 조선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고종 3년(1866)에 강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의 마찰이 있었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고종 8년(1871년)에 강화 강성보에서 미군과의 전투인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승리한 후 외국인을 배척하고 쇄국주의(鎖國主義)를 고창(高唱)하였으며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에 전국 요충지에 비를 세웠는데 남해 노량에도 세웠다. 내용은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계오만년자손(戒吾萬年子孫) 병인작(丙寅作) 신미입(辛未立)” 풀이하면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라고 큰 글로 쓰고 만년에 훈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라고 적은 글씨로 좌측에 새겨져 있다. 처음 척화비가 입석되었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향인이 설천중학교 입구에 이전 보전하였으나 1998년 8월 5일에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에서 옛 자리를 찾아 현 위치에 이설하였다(남해역사연구회).
관리주체
기타
국립공원
한려해상
문화자원명
남해 척화비
보존상태
보존상태 양호
상세수량
1
자원관리자
남해군
자원세부내용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이후에 외국인을 배척하고 쇄국주의(鎖國主義)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 척화비도 그 중 하나이다. 비의 내용은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계오만년자손(戒吾萬年子孫) 병인작(丙寅作) 신미입(辛未立)”이다. 즉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라고 글로 쓰고 만년에 훈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라는 뜻이다. 낮은 사각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맨 위에 지붕돌을 올려놓아 다른 척화비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는 당시 대원군의 명으로 척화비를 곳곳에 세우자 이 지역의 관청에서 그것을 본떠서 세우면서 양식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 비를 세운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방치된 것을 설천중학교 입구로 이전 보호했다. 1998년 8월 5일에 남해군과 남해문화원 주도로 원래의 자리로 다시 옮겨 세웠다.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
자원소유자
남해군수
자원수량
1
자원입지
기타
지번주소
참고문헌
국립공원관리공단 2009 > 국립공원관리공단 남해역사연구회(http://www.nhistory.kr)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
최초모니터링년도
2010
탐방프로그램활용여부

상세 시스템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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