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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산 139-1

정유재란호벌치전적지의 전체 정보

관련문화자원내용
○문화재지정 : 전라북도기념물 제30호 1976년 4월 2일 호벌치전적지는 임진왜란의 막바지 싸움인 정유재란때 이 지방의 의병들이 맨주먹으로 왜적을 맞아 혈전을 벌여 장렬하게 전사한 호벌치 고개의 싸움터를 말한다. 임진왜란 때 흥덕사람 채홍국이 중심이 되어 부안 고부 흥덕 고창 등지에서 규합한 92명의 충의지사와 더불어 흥덕의 남당에 모여 삽혈동맹을 맺고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는 맹세를 한 뒤 의병을 일으켜 크게 이겼으나 그 후 정유재란 때는 이 곳 호벌치에서 왜적과 분전하다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1965년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이 곳에 높은 충혼을 위로하는 비를 세웠다.(변산반도국립공원 부안 p.60) 1)호벌치싸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이 고창 흥덕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동지 92인과 삽혈동맹(말의 피를 나눠 마심)을 맺고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았다. 400여 석의 곡식을 모아 용만의 행재소와 영남의 곽재우에게 나누어 보냈고 왜적과 싸우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옛 동지들을 모아 창의에 나서 흥덕에 들어온 왜군을 물리쳤다. 후퇴한 왜군이 부안으로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채홍국은 군진을 부안으로 이동하여 우반동에 진을 치고 적을 기다렸다. 마침내 1597년 호벌치에서(4월 14일에 적이 돌격해 오자 이때부터 4월 23일까지 10일동안 채홍국 일기에 기록되었으나 이때는 정유재란이 시작되지 않은 앞선 시기여사 바로 잡을 필요 있음)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왜군이 장등에 주둔하자 채홍국이 급히 발병하여 쳤다. 이시화가 전사하고 조익령이 왜군에게 붙잡히자 채홍국은 조익령을 구출하려고 왜군을 쫓았으나 적에게 불의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명달과 처달도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 적진에 뛰어들어 마친내 장렬하게 전사하여 3부자가 모두 전사하였다. 호벌치 전투는 치열했다. 그러기에 많은 희생자가난 전투였다. 결국 왜적은 물리쳤지만 대부분의 의병들은 전사하고 말았다. 1965년 8월에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2)호벌치에 안치된 코무덤 정유재란 때 전라도에 쳐들어온 왜군 병사들은 그들의 전과를 보고하기 위해 조선 군사의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냈다. 이들이 코를 베는 대상은 민간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왜군이 베어간 코는 일본 오카야마현에 코무던으로 만들어졌다. 이 코무덤은 1992년 11월 24일 대한해협을 건너와 부산 동래 자비사에 임시 봉안되었다. 임진왜란 비총 환국안장 추모사업위원회는 1993년 11월 26일 상서면 감교리 호벌치에서 코무덤 봉안식을 거행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왜군은 18만5천여 명의 귀와 코를 베어갔는데 호벌치에 봉안된 코무덤은 그 일부로 쿄토의 귀무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추모사업위원외측은 정유재란 때 왜적에 맞서 싸운 격전지로 알려진 이곳 호벌치를 안장 장소로 택했다고 밝혔다. 4백년 만에 한 줌 흙이 되어 돌아온 조상들의 영령을 안장한 것을 계기로 이곳 호벌치는 수난의 민족사를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 되었다.(부안문화유산자료집 p.427~428) 3)호벌치 전적비문 부안군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를 유정재 호벌치 또는 적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되놈을 정발한 고개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후 1597년 정유재란 때 이 곳으로 침공하여오는 왜군을 이 지방의 의병장 채홍국 김영년을 중심으로 92명이 삽혈동맹을 맺고 이곳에서 처절하게 싸웠고 장렬하게 순절한 격전지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하여 부안군에서 1965년에 이곳 고개 마루에 전적비를 세웠는데 비분은 봉산 김현술이 지었다.(이 호벌치 전투 일부 기록에 대하여 고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학계의 논란이 되어오고 있다. 정유의 난은 1597년 시작되어 그 주력부대의 일부가 호남지방으로 침벙하여 처음 전투로 남원성이 8월 16일에 함락되었고 이후 전주 등이 무혈로 점령당하면서 부안지역으로도 침공하여 왔었는데 호벌치 싸움의 기록들은 모두 3월 23일 부터 4월 20일 경으로 되어 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시의 문제에서 남원성 전투보다 6개월이나 앞서고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군이 호남지방에서 저투를 시작하기 6개월 이전에 이미 호벌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연구와 입증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할것이다.(부안문화유산자료집 p.458~459)
관리주체
기타
국립공원
변산반도
문화자원명
정유재란호벌치전적지
보존상태
보존상태 양호
상세수량
1
자원관리자
부안군
자원세부내용
정유재란호벌치전적지(丁酉再亂胡伐峙戰蹟地)는 개암사에서 줄포 쪽으로 2km쯤 가면 낮은 오르막길이 나오고 오른쪽 노변 공원 같은 곳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이 호벌치 전적지이다. 지금은 그 하단에 20 09년 5월 19일 민충사를 준공하였다. 임진왜란 때 채홍국(蔡弘國)은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의 두 의병장의 패전 소식을 듣고 근 방에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려 부안 흥덕 고부 고창 등지에서 충의지사들이 모여들었다. 92명의 지사들은 1592년 9월 16일 흥덕의 남당에서 삽혈동맹을 맺고 궐기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들은 곡식 400석을 모아 권율 장군에게 보내 300석은 해운 편으로 임금이 머물고 있던 의주 행재소(行在所) 로 보내게 하고 나머지 100석은 영남의 곽재우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후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 란이 일어났는데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왜군들은 그들의 주력부대를 전라도에 투입하여 호남 각지가 적 에게 유린되었다. 왜병들은 바다를 이용 변산에 상륙하여 줄포로부터 부안읍으로 진격해왔다. 이때 채 홍국은 다시 뜻 있는 의사 33명을 더 모집하여 총 126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4월 중순부터 1주일간에 걸쳐 왜적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버렸다. 1965년 8월 주민들의 뜻을 모아 이곳에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호벌치라는 지명은 당나라 소정방(蘇定 方)이 이곳에 상륙하여 유진치(留陳峙)와 주류성(周留城) 일대에 통수부(統帥府)를 설치하였던 데에 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자원소유자
부안군
자원수량
1
자원입지
기타
지번주소
참고문헌
○ 참고문헌 - 국립공원관리공단, 2009, 국립공원 역사문화자원 자료집, 국립공원관리공단 - 국립공원연구원, 2009, 변산반도국립공원 자연자원조사, 국립공원관리공단 - 부안군, 2004, 부안군문화유산 자료집, 부안군 - 부안군, 2001, 변산반도국립공원 부안 ○ 참고사이트 - 부안문화원(http://buan.kccf.or.kr/) - 부안군청(http://www.buan.go.kr/)
최초모니터링년도
2010
탐방프로그램활용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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