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 7-10
영문주소
44-7 Chunghyo 2-gil, Gyeongju-si, Gyeongsangbuk-do

경주 김유신묘의 전체 정보

관련문화자원내용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구릉위에 사적 제21호인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묘의 지름은 30m 정도이며 주위에 호석과 난간을 두른 원형분으로 호석에는 12지신상을 두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묘의 동쪽 산 아래에는 금산재가 있다. 능 앞에는 70년대에 설치한 혼유석과 조선시대 숙종 36년 (1710)에 당시 부윤이던 남지훈이 세운 표석이 있으며 석사자와 석인상 등은 없다. 1960년대 이전에는 일제시대 석인상이 있었으나 1970년을 전후하여 철거 되었다. 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은 모두 평복에 무기를 잡고 있으며 헌덕왕릉과 황복사지 경우와 같이 모두 오른쪽 방향을 보고 있다. 또한 납석제 십이지신상인 묘(卯)상과 오(午)상 해(亥)상이 발견된 바 있으며 높이가 30㎝의 작은 상들이고 무복을 입은 무장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김유신은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의 후손으로 진평왕 31년 이찬 임영리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칠 때 중당의 당주로서 출전 큰 공을 세웠으며 64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이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660년 상대등에 올랐고 당(唐)군과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 시켰으며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의 최고직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673년 7원1일에 죽자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묘비를 세우게 했다. 장지는 금산원 이었으나 현재 묘비는 전하지 않는다. 835년 흥무대왕으로 추존되고 조선후기에 와서 서악서원에 설총 최치원과 함께 배향되었다.
관리주체
기타
국립공원
경주
문화자원명
경주 김유신묘
보존상태
보존상태 양호
상세수량
1
자원관리자
경주시
자원세부내용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595~673)의 무덤으로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다. 둥근 모양의 봉분 아래에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支神像)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무덤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이다. 12지신상을 묘의 호석(護石)에 조각한 것은 통일신라의 고유한 양식이다. 중국에서 묘실 안에 12지신상을 만들어 넣은 예는 있지만 봉분 주위에 조각한 것은 통일신라만의 독특한 창의물이다. 이런 양식은 성덕왕(702∼737)릉에서 부터 보이고 있다. 성덕왕릉 12지신상은 완전 입체상으로 독립되게 만들어져 봉분 주위에 방위에 따라 서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하였다 하며 삼국사기에도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 경주부윤이 세운 비만 남아 있다.
자원소유자
금산종무위원회
자원수량
1
자원입지
기타
지번주소
참고문헌
강우방 1982 「통일신라 십이지신상의 분석과 해석」 『불교미술』1집 동국대박물관 문정창 1972 「김유신묘고」『창조』26-9호 창조사 권오찬 1979 「신라의 빛」 경주시 116~120쪽 有光敎一 1936 「십이지생초의 석조를 두른 신라의 분묘」 『청구학총』25집 청구학회 關野貞 1932 「조선 미술사」 조선사학회 경성
최초모니터링년도
2010
탐방프로그램활용여부

상세 시스템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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